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한 대토벌 작전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1907년 [[정미 7조약]]에 의해 [[대한제국]]의 군대는 강제 해산당하고, 해산된 정규군은 [[남대문 전투]]와 각 지방 진위대의 봉기 이후 전국 각지에서 활발히 움직임을 보이던 의병에 가담하게 된다.[* 특히 [[일본]]의 통제와 감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던 지방의 [[진위대]]에서 이런 움직임이 더욱 활발했다.] 이 시기 일어난 의병들을 [[정미의병]]이라고 부르는데, 각종 신식 무기를 손에 든 정규군[* 물론 그래봤자 [[일본군]]의 장비와 비교하면 보잘 것 없기는 했다.]이 가담함에 따라 의병들의 전력은 대폭 증강된다. 각개 활동하던 전국의 의병들이 [[13도 창의군]]이라는 하나의 통일된 조직을 만들어 [[서울 진공 작전]]을 펼치기까지 한다. 애초에 전력이 명백한 열세였던데다가, 총사령관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면서 전투 직전에 진영에서 이탈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[* 유교적 사고 방식으로 당연히 정당화되고 모두들 납득할 수있었다면 당시 이인영의 낙향을 되돌리려 설득을 시도한 같은 유림들이 왜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.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예시에서 보듯 유교 역시 전쟁 등 피치 못한 긴급한 상황인 경우 집안 제사 등은 잠시 유보하는 걸 허락했다. 때문에 정통 유학자의 관점에서도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빠져야 할 이유가 없었고 부친상은 얼마든지 연기하는 게 당시 유교적 시각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.] [* 그래서 이를 두고 이인영이 혼자 도망쳤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으나 떠나기 전부터 그냥 물러난게 아니라 이미 진공작전이 어렵게 되었다고 보고 의를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의병진에 돌려 서울진공작전을 중지시켰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이인영은 나름 자신의 할일을 다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실제로도 허위나 민긍호의 합류로 이인영이 없어도 체제가 굴러갈 수 있었기에 실제로는 어처구니 없이 작전이 터진게 아니라 이건 아니라고 보고 서울진공작전을 취소하는 대신 기존의 유격전 작전체계로 다시 돌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.]까지 터지면서 이 작전은 허무하게 실패로 끝났지만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행동이었고, 각 지역의 [[의병]]들의 근거지를 진압하게 된다. 1907년대의 정미의병은 원주, 여주, 진주, 양주, 강화 등 진위대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벌어졌으나 지속되는 일제의 토벌로 의병활동의 근거지는 경기도, 강원도, 충청도, 경상도가 차례로 진압되면서 점차 전라도로 옮겨가게 된다. 1908년 전라도의 의병 교전 횟수는 전국 전체에서 25%를 차지하였고, 의병의 수도 마찬가지로 25%를 차지했다. 1909년에는 더더욱 심화되어 1909년 6월까지 전투 횟수의 47.3%, 전투 의병 수의 50.1%가 호남에서 활동하였다. 이렇게 의병들의 마지막 근거지인 전라도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작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. > 일제의 추산에 의하면 남한 대토벌 작전 직전 호남 지역의 의병은 의병장 약 50명을 포함하여 약 4,000여 명에 달했다. 이처럼 호남 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이곳이 1894년 [[동학농민운동]]의 본거지[* 그도 그럴게 전라도는 곡창지대다. 당연히 농민운동의 본거지가 될 수 밖에..]로서 반일 의식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1904년 [[러일전쟁]]을 전후로 하여 일본인에 의한 토지 침탈, 경제적 수탈이 극심하여 반일 의식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. 따라서 일제는 호남 지역의 의병을 완전히 진압하지 않고서는 의병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대규모 군사 작전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. - 남한대토벌작전 [南韓大討伐作戰] (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, 한국학 중앙 연구원)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